동족을 향한 눈물의 기도

이스라엘 성을 바라보며 두 손을 들고 눈물로 기도하는 바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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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9:1~5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우리는 흔히 믿음이 자라고 성숙해질수록 마음이 점점 더 평온해지고, 근심에서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걱정과 눈물은 믿음이 약한 사람의 몫이고, 믿음이 굳건한 사람은 확신과 기쁨 안에만 머문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읽어가다 보면 이 통념이 무너지는 지점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8장과 9장이 이어지는 자리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을 이렇게 마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이보다 더 완벽한 승리의 고백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확신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 9장 1절에서 바울은 근심과 고통을 토로합니다.

승리의 찬가를 부르던 사람이 곧바로 눈물을 흘립니다.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근심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을 놓고 울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바울의 근심, 무엇을 향한 것인가

바울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근심하고 있습니까? 3절이 답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입니다.

여기 “골육의 친척”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쉰게논(συγγενῶν)입니다. 단순히 먼 혈통상의 연결이 아니라, 살과 피를 나눈 가까운 친족, 한 몸에서 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은 바로 앞 8장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에서 아무것도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선포한 그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9장에서는 자기 동족, 자기 골육을 이야기합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얻은 사람이, 여전히 땅의 핏줄을 붙들고 웁니다.

믿음이 자란다는 것은 혈연과 인간관계를 초월해서 무감각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함께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간절한 기도였는가

그런데 바울의 근심은 얼마나 깊었습니까? 3절을 다시 보십시오.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 문장의 헬라어 구조를 보면 그 강도를 알 수 있습니다. “원하는 바로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코멘(εὐχόμην)은 미완료 시제, 곧 계속해서 반복되는 동작을 나타내는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미완료 시제는 한 번의 감정적 폭발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마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기도는 격정에 휩싸여 순간적으로 내뱉은 말이 아니라, 바울이 되풀이해서 품어 온 간구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주”로 번역된 단어는 아나데마(ἀνάθεμα), 완전히 끊어져 저주 아래 놓이는 것을 뜻하며, “끊어질지라도”라는 표현 앞에는 헬라어 전치사 아포(ἀπό)가 붙어 있습니다. “아포”는 단순한 거리감이 아니라 완전한 분리,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는 전치사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토록 붙들고 살았던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 생명 자체가 끊어지는 것조차 감수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바울은 여기까지 나아갑니까?

자기 백성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구원까지도 내려놓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8장 말씀을 통해 그 무엇도 성도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이미 압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신학적으로 실현 가능한 요청이라기보다, 사랑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극단의 지점을 보여주는 고백입니다.

이와 같은 기도를 우리는 출애굽기에서도 만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께 범죄했을 때, 모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출 32:32)

자기 백성의 죄 사함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져도 좋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모세, 천오백 년의 시간을 두고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이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결국 자기 백성을 위해 눈물로 중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성경은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특권이 있어도 구원은 아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근심하는 그 동족, 이스라엘에게는 무엇이 부족했습니까? 4~5절을 보면 놀랍게도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4~5절).

하나님의 자녀 됨, 임재의 영광,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들, 시내산의 율법, 성전의 예배, 메시아의 약속, 믿음의 조상들, 그리고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그들 가운데서 나셨다는 사실까지—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바울은 이토록 근심합니까?

그 모든 특권이 있어도, 믿음이 없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후손으로 태어난 것, 율법을 소유한 것, 성전에서 예배드려 온 것—이 모든 것은 은혜의 통로였지만, 그 자체가 구원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흘리는 눈물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알았던 사람들이, 정작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 앞에서는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교회에서 태어나고, 모태신앙으로 자라고, 직분을 맡고,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이 모든 것이 은혜의 통로일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구원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입니다.

어느 권사님이 평생 교회를 섬기면서도, 정작 믿지 않는 아들 때문에 마음이 무너져 있었습니다. 그분은 아들에게 신앙을 강요하지도, 정죄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매일 새벽마다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신앙이 아니라 저 아이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십 년이 지난 어느 날, 그 아들은 스스로 교회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그가 나중에 고백한 것은 설교의 감동이 아니라,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흘린 눈물의 기억이었습니다.

바울의 근심이 그러했듯,
한 사람을 향한 눈물의 기도는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나가며

바울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면서도, 믿지 않는 동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이름이 있을 것입니다.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가족과 이웃의 이름입니다.

이번 한 주간,
정죄가 아니라 눈물로,
그 이름을 놓고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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